[00Q] 오렌지 파우더

Double-0-Seven 2013. 5. 18. 00:01






 콜록,

모니터를 주시하던 Q의 머그잔에 담긴 커피가 잔잔하게 출렁거렸다.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기침 소리 정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콜록, 콜록, 연이은 열댓 번의 기침과 앓는 소리는 Q브랜치 내에서 바삐 움직이던 뭇 직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Orange Powder

- 13.05.17 -





직원들이 흘끗거리며 Q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 중 한 여직원이 서랍을 뒤적거리다 무언가 한 움큼 손에 쥐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Q에게 건네주었다. 작은 사탕 몇 알이었다.

- 천천히 녹여 먹어요. 기침이 좀 덜할 거예요.

- 미안해요, 내가.. 많이 시끄러웠나요?

- 오, 아니에요. 다들 걱정하고 있거든요.

-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Q의 목은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사탕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일시적인 방법이기는 해도, 기침이 많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아예 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 후 본드의 무전이 올 때까지도.

 때마침 마지막 사탕을 우물거리던 참이었다. Q는 무전 도중에도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억지로 기침을 참아냈다. 항상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임무를 수행 중인 요원이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결국, 참았던 기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숨이 넘어갈 듯 콜록거렸다. 그 소리에 Q브랜치 직원들 몇몇이 당황하다 허둥지둥 따뜻한 물을 떠다 주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안정을 취하는 Q의 귓가에 평온한 본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자네 괜찮나?

- 네, 물 마시니까 좀 낫네요. 계속 가시죠.

- 그러지.

그의 무심한 태도에 Q는 약간 실망한 듯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한 번만 더 물어보시지. 그렇게 괜찮지는 않은데. 빈말이라도 잠깐 쉬라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 * *



 Q는 퇴근하기 전까지 계속 뚱해 있었다. 기침 때문에 목이 부어서 신체적인 피로로 저기압인 것도 있었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었다.

퇴근 직전, 본드가 무사 귀환 소식을 알리며 Q브랜치 안으로 들어왔다. 막 머그잔과 랩탑을 챙기던 Q는 본드가 서 있는 쪽을 흘끗 보고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Q가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본드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비키라는 듯 쏘아보는 Q에게 본드가 다짜고짜 들이민 것은 작은 상자였다.

- 뭡니까. 이 상자는.

- 감기에 좋다더군.

- 그러니까, 뭐냐고 물었잖아요.

- 자네는 그 나이 먹고 글자도 못 읽나?

- 'Orange Powder'. 저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 기분 좀 풀어. 말린 귤껍질 가루라고 하더군. 뜨거운 물에 태워 마시면 돼.

- 아, 예..

얼떨떨한 기분으로 상자를 받고 멍하니 서 있던 Q는 뒤늦게 잠시나마. 아니, 사실은 그다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본드에게 실망했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몰려드는 창피함과 고마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 인사를 중얼거리기도 전에 본드의 입이 Q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 자기 전에 꼭 마시고.

분명 기침뿐인 감기였는데. 뺨에서부터 주황빛으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 * *



- 형, 그냥 감기야. 좀 쉬면 나을 건데.. 약? 됐어. 괜찮다니까? 플랫 앞이야. 끊을게.

 Q는 플랫에 들어오자마자 어딘가에 넣어두었던 투명한 유리 찻주전자를 꺼내왔다. 형이 준거였지 아마. Q 자신은 커피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다지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깊숙이 넣어둔 것이었다. 덕분에 하얀 먼지가 뽀얗게 쌓여서 물로 닦아내야 했다. 물방울 맺힌 유리주전자가 반짝거렸다.


 조용한 가운데 은은한 주황색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내고 있다. Q의 플랫 안은 어느새 귤 향기로 가득 찼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오렌지색으로 물든 것처럼. Q는 차와 함께 먹을 작은 케이크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고 자신은 얇은 담요를 덮었다. 그리고 가만히 끓는 물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진한 색이 나올까? 시간은 오후 11시를 넘어섰다.



* * *



 본드는 담담한 척 했지만, 사실은 무전을 통해서 전해진 Q의 상태가 걱정됐다. 심한 기침에 혹시 목이라도 상하면 어쩌나, 더 심해져서 면역이 약해지면, 다른 병이라도 같이 온다면? 물론 자신도 과한, 괜한 걱정이라고 도리질을 했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입에 달고 사는 커피 대신 마시라는 의미로 오렌지 파우더를 전해주긴 했지만 역시 걱정이 가시지는 않았다. 결국, 자신의 플랫이 아닌 Q의 플랫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크를 해도, 초인종을 한번 눌러보아도 반응이 없었다. 자는 건가? 그럼 깨우지 말아야겠군.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틈새로 Q의 부스스한 머리칼이 삐져나왔다. 막 자다 일어난 모습이 본드를 미안하게 만들었다. Q가 안경 아래로 잠 덜 깬 눈을 비비며 어쩐 일이냐고 물어왔다.

- 걱정돼서 와봤는데, 아무래도 자는 걸 깨운 것 같군.

- 아. 아니에요. 차 끓이다 깜빡 잠들었어요.

차? 본드는 진심으로 우러나는 흐뭇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이렇게 말을 잘 들을 줄이야. 착한 아이라고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오신 김에 요원님도 차 한잔 하고 가시는 건 어때요.

- 좋지.


 본드가 플랫 안으로 들어섰을 때까지도 여전히 오렌지 향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기분 좋은 향기에 본드는 Q를 향해 빙긋 웃었다. Q는 작은 케이크 조각을 하나 더 꺼내 본드 앞에 내려놓으며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 향이 좋더라고요.

-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 괜찮죠?

- 상상 이상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마저 달콤한 주황색 솜사탕 같았다. Q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고 한번 홀짝였다. 과하게 달지 않고 약간은 새콤하면서도 끝 맛이 기분 좋게 씁쓰레했다. 생크림 얹은 케이크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본드는 케이크를 우물거리는 Q를 보며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본래 술 체질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케이크 또한 영 입에 맞지 않았지만, 입가심할 디저트는 자신 앞의 쿼터마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늦은 시간, Q와 본드가 함께 있는 방 외의 모든 불은 꺼져있고. 그 방의 불마저도 환한 전등이 아닌 은은한 보조 등으로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드라마틱하게도, Q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이 본드를 더욱 자극했다. 더욱 클리셰적이게, 본드는 Q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 자넨 애가 아닐 텐데. 그럼 이건 일부러 묻힌 건가?

- 놀리는 것 좀 그만두시죠. ...웃지도 마시고요.

- 화내는 거 보니까 다 나은 것 같은데.

- 아뇨, 아직 감기끼,가..

본드는 천천히 Q에게 다가갔다. 은은한 불빛, 향긋한 오렌지 향. 분위기에 휩쓸린 걸까, Q는 가만히 본드를 바라보다 순순히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어느새 허리에 올려진 본드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Q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혀가 감겨오며 키스는 조금 더 진해졌다. 입안 가득 몽롱한 오렌지 색. 본드의 손이 Q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고 가슴께를 쓸었다.

- 요원님.. 감기, 옮..을지도.. 아니, 옮아도, ...전 몰라요.

- 까짓 거 가져가지.

본드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를 향해가자 Q는 그의 손목을 잡아 제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열로 붉어진 Q의 입술 사이로 민망한 소리가 새나올 때쯤, 요란하게 초인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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